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상당히 지적이고 다채로운 소설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다양한 화자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죽은 시체, 개, 나무 등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등장인물과 동물, 심지어 사물의 시선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다양한 화자에 의해 전개되는 이야기는 정교하게 하나의 플롯으로 연결된다.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술탄의 명에 의해 비밀리에 밀서를 제작하던 궁정화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16세기 후반의 유럽엔 이미 르네상스가 꽃피웠고, 화가들은 중세의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이제 화가들은 종교적 테마 보다는 군주나 귀족과 같은 당대인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이슬람의 회화는 여전히 옛 전통 그대로 대상을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묘사하는 세밀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세밀화는 책의 내용을 완벽히 재현하는 삽화로서 어떠한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화가 개인의 서명이나 스타일에 의한 변형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옛 거장들의 그림을 정확히 재현해 내는 것만이 최선으로 요구되었다.
술탄의 대사로 베네치아를 방문한 에니시테는 그곳의 궁전과 귀족의 저택에 걸려있는 초상화들을 보곤 그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그건 세밀화처럼 이야기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바로 그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결국 에니시테는 술탄을 설득해 밀서를 제작하게 되고, 그 책에는 유럽의 화풍이 도입된 삽화가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세밀화가들은 '전통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럽의 화풍을 받아들일 것인가'와 같은 갈등과 불안을 겪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터키 이스탄불 출생으로, 작년에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어릴적 화가가 꿈이었던 파묵은, 열세 살 때 이미 16세기와 18세기 세밀화의 기법의 차이를 구별할 정도로 세밀화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문단 데뷔 후 오랫동안 세밀화에 관한 자료를 비롯하여 이슬람의 전설과 민담, 역사적인 기록들을 조사하여 이 책을 완성해 냈다고 하는데,
책 곳곳엔 그러한 흔적이 짙게 배여 있다.